의료기기 업계에서 규제과학(RA)과 품질보증(QA
) 업무를 10년 넘게 해오다 보면, 유럽의 CE 인증 제도는 늘 '넘기 힘든 산'이자 '끝없는 숙제'처럼 느껴집니다. 그동안 EU MDR(EU 2017/745)과 IVDR(EU 2017/746) 도입 이후, 수많은 제조사가 지나친 행정 부담, 인증 지연, 그리고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인해 혁신적인 제품 출시를 포기하거나 유럽 시장을 철수하는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듯, 유럽집행위원회(EC)는 규제 체계를 합리적으로 간소화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대대적인 개정안 'COM(2025) 1023' (첨부파일 원문 첨부) 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실무 서류나 뉴스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도대체 'COM'이 뭘 뜻하는 거지?"라는 의문부터 드실 겁니다.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이 용어부터 명확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 잠깐! "WHAT IS COM?" (COM 번호의 의미)
규제 문서를 볼 때 자주 마주치는 COM은 ‘European Commission(유럽집행위원회)이 공식적으로 채택·발의한 집행문서(Communication / Commission Proposal)’를 의미합니다.
- 뒤에 붙는 숫자는 고유 문서 번호로, COM(2025) 1023은 "2025년에 유럽집행위원회가 1023번째로 발의한 공식 안건"이라는 뜻입니다.
- 즉, 의료기기 분야에 한정해 보면 "EU 집행위원회가 기존 MDR(EU 2017/745)과 IVDR(EU 2017/746) 제도의 심각한 부작용(행정 지연, 과도한 비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대폭 개정하겠다고 의회에 제출한 공식 입법 제안서"를 의미합니다.
당장 내일부터 법이 바뀐다는 뜻은 아니지만, EU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칼을 대려는지 보여주는 가장 강력하고 정확한 이니셔티브이므로 RA/QA 전문가라면 반드시 그 내용을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1. 이번 개정안(COM(2025) 1023), 무엇이 달라졌나?
NAMSA 등 글로벌 규제 전문 기관들의 분석을 종합해 볼 때, 실무 현장에 가장 큰 숨통을 틔워줄 핵심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CE 인증서 유효기간 5년 제한 삭제 (지속적인 리뷰 체계로 전환)
- 기존: 최대 5년마다 돌아오는 갱신(Recertification) 심사 지옥으로 인해 제조사도, 심사기관(Notified Body, NB)도 극심한 병목 현상을 겪었습니다.
- 개정안: 고정된 5년 유효기간 제한을 없애고, 위험도 기반의 정기 리뷰(Periodic Reviews) 및 지속적인 인증 유지 체계로 전환됩니다.
② 기술문서(Technical Documentation) 및 임상 데이터 범위의 유연화
- 비임상 테스트 인정 범위 확대: 전통적인 벤치 테스트뿐만 아니라 in silico 테스트, 컴퓨터 모델링 및 시뮬레이션(Computational modelling/simulation) 데이터가 공식적인 임상/성능 평가 데이터로 폭넓게 인정받습니다.
- WET(Well-Established Technologies) 완화: 장기 이식형 기기 중 검증된 구형 기술(WET)에 대한 과도한 임상 요구사항이 합리적으로 조정됩니다.
- PSUR 및 보고 주기 완화: 사후시장관리(PMS)에서 PSUR(정기 안전성 보고서) 제출 주기가 완화되고, 중대한 이상사례(Vigilance) 보고 기한도 기존 15일에서 30일로 연장되는 등 행정 호흡이 여유로워집니다.
③ 혁신 기기 전용 트랙(Breakthrough / Orphan Device) 및 Sandbox 신설
- AI, 디지털 헬스케어 등 혁신 의료기기와 희귀질환용 기기(Orphan Device)를 위해 전문가 패널(Expert Panel)이 연계된 우선 심사 트랙이 신설됩니다.
- 규제 샌드박스(Regulatory Sandbox) 도입을 통해 실제 환경에서 신기술을 안전하게 시험하며 규제 적용을 조율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2. 10년 차 RA/QA가 바라보는 '진짜 실무 포인트' (시사점)
개정안의 방향성은 분명 '규제 완화와 효율화'이지만, 현업에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세부 디테일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 기술문서 전략의 재수립 필요: 그동안 철저히 임상 문헌이나 전통적 임상시험 데이터에만 목을 매었다면, 이제는 in silico 시뮬레이션이나 벤치 테스트 데이터 패키지를 기술문서(TD) 내에서 얼마나 논리적으로 빌드업할 것인가가 RA 역량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 사후관리(PMS)와 사이버보안의 결합: 문서 부담은 줄어든다고 하지만, AI 성능 드리프트(Drift)나 사이버보안 취약점 모니터링 같은 현대적 리스크에 대한 사후관리 프로세스는 오히려 더 구조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아직은 '제안(Proposal)' 단계라는 점: 이 문서는 당장 강제되는 법이 아니라 EU 집행위원회의 공식 제안입니다. 입법 절차 과정에서 일부 조항이 수정될 수 있으므로, 지금 당장 기존 인증 전략을 전면 백지화하기보다는 "우리 파이프라인 중 어떤 제품이 WET 면제나 혁신 트랙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 미리 스크리닝해 두어야 합니다.
3. 맺음말: 변화의 물결 속에서 기회를 찾는 법
유럽 규제는 언제나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지만, 이번 COM(2025) 1023 개정안 제안은 EU가 생태계 고립과 혁신 저해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탄입니다.
10년 넘게 규제 대응 최전선에 있어 온 우리 RA/QA 전문가들 역시 변화하는 바람에 맞춰 기술문서 작성 패러다임을 바꾸고, 비용 효율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근거 중심의 대응 전략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앞으로의 입법 진행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실무에 유용한 인사이트가 생길 때마다 블로그를 통해 또 공유해 드리겠습니다.